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밴드 오브 브라더스/줄거리 (문단 편집) == 제6화: Bastogne(바스토뉴) == * 중심 인물: [[유진 로]] [[상병]] * 전투: [[아르덴 대공세]] 바스토뉴에 포위된 101공수사단은 힘겹게 독일군의 공격을 막아 내고 있었다. 방어선이 너무 얇게 펼쳐져 있어서 아침부터 [[대변|볼 일]]보러 독일군이 오는 수준이다. 3대대에 의료물자를 구하러 돌아다니다 자고 있는 독일군을 건드려 벌떡 일어난 독일군의 사격에 도망가는 개그씬을 찍기도 한다. 이 와중에 이지 중대의 의무병인 유진 로 상병은 의료에 필요한 [[모르핀]], [[혈장]], [[주사기]], [[가위]], [[붕대]] 등이 모자라 상당히 애를 먹고 있었다. 이지 중대에는 의무장교가 하나도 없어서, 유진이 거의 유일한 의사였다. 고립되어있어서 육상보급은 끊겼고, 계속되는 짙은 안개로 비행기가 뜰 수 없어 공중보급(드랍) 또한 기대할 수 없는 상태였다. 추운 날씨 탓에 병사들은 동상과 참호족으로 이중고를 겪고 있었다. 게다가 너무나도 빨리 진격한 탓에 보급로가 길어져 방한복이나 양말 같은 보급품들이 도착하지 못했다. 이에 버티지 못한 장교들이 골짜기에서는 잘 안보이니 괜찮다며 몰래 불을 피우며 몸을 녹이지만, 얼마안가 미세하게 나오던 연기를 포착한 독일군이 포격을 하며 큰 피해를 입는다. 이를 통해 영화는 아무리 죽도록 힘들어도 해서는 안 되는 짓은 절대로 해서는 안된 다는 교훈을 준다. 독일군의 거센 공격과 포격까지 더해져 사상자는 나날이 속출하는 형편이었다. 한편 스키니 시스크 하사가 박격포 공격으로 다리에 부상을 입자 그를 지프차에 싣고 바스토뉴의 임시 야전병원으로 간 유진은 의료 봉사 활동을 하던 벨기에 여자 르네를 만나게 되어 친해진다. 크리스마스가 지나도 포위망은 풀릴 기미를 보이지 않고, 전투 정찰 중에 신참 줄리엔이 전사하는가 하면 독일군의 계속된 공격에 사상자가 속출하자 유진의 정신상태는 점차 피폐해져 간다. 나중에 가면 포격을 받아 부상자를 치료하러 가야 되는데 참호 안에서 넋놓고 있기도 한다. 영상에서는 이런 유진의 상태에 대해 드라마적 요소를 살리기 위해 르네라는 캐릭터를 활용한다. 유진은 어머니가 케이준 힐러로서 성장과정에서부터 [[의료행위]]와 밀접해 있어서 이에 대해 특별히 의문이나 거부감을 갖지 않고 복무했었다. 하지만 주변 의료인들의 고생이 담긴 푸념을 들게된다. 동료인 스피나는 자신은 의사가 될 것도 아닌데 왜 의무병을 지원했는지 모르겠다며 투덜거렸고, 르네는 부상병을 치료할 바엔 백정(정육점집 점원이 정확한 번역이지만 부정적인 의미를 담아서...)이 되는 게 낫겠다며 푸념한다. 말은 그렇게하지만 부상병이 오자 반사적으로 도우러 간다. 유진 자신도 이에 대해 고민하기 시작한다. 게다가 중상자를 싣고 바스토뉴로 다시 가 보니 바스토뉴는 독일 공군의 대규모 폭격을 받아 거의 박살이 나고 있는 상황이었고, 임시 야전병원으로 쓰이던 교회는 폭격으로 파괴되어 르네 역시 죽고 만다. 직접적으로 시신이나 죽는 장면이 등장하지는 않지만 죽음이 암시된다. 유진은 큰 슬픔에 빠지지만, 곧 다시 마음을 굳게 고쳐먹고 의무병으로서의 임무를 수행한다. 중대원들을 철저하게 성으로만 부르던 유진이, 헤프런에게 처음으로 별명인 '베이브' 라고 불러주는 장면에서 유추해 볼 수 있다. 또한 헤프런을 치료할 때, 붕대를 꺼내려다 르네의 유품인 머릿수건이 나오자 이를 들고 잠시 고민하지만, 이네 단호히 찢어 붕대로 활용하는 모습에서도 그의 심경 변화를 관찰할 수 있다. 한편 101공수사단은 [[조지 S. 패튼]] 장군의 제3군 휘하 제4기갑사단이 포위망을 뚫고 들어와 활로를 열고 바스토뉴를 지켜낼 수 있게 되었다. 하지만 101공수사단의 그 누구도 바스토뉴 사수의 공이 패튼의 작전 성공에 있다고 생각하지 않았다. 패튼의 작전이 있든 없든 101공수사단에 의해 사수되었을 것이라는 의미. 사실 101공수사단의 전력은 대체로 건재했지만, 공수보급에도 불구하고 보급품이 극도로 부족한 상태였기 때문에 101공수사단이 다음 독일군 공세를 막아내긴 힘들었을 것이라는 것이 역사가들의 의견이다. 사실 포위가 풀리기 전 마지막 공세에서도 독일 기갑척탄병 부대의 맹공으로 바스토뉴 중심이 함락될 뻔했기도 하고(독일군의 실책으로 병력이 분산되며 101공수의 방어가 간신히 성공할 수 있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